묵우운간, 석화지, 장락곡 - 티빙/웨이브 중드 찍먹 리뷰
몇 년마다 한 번씩 중국드라마를 보는 사이클이 돌아오는데, 한드 미드 영드 다 보기 싫은 때 오는 것 같다. 이번에도 역시나 뜨개 하면서 볼 것들 중 그나마 '익숙'하고 '길게 볼' 것들을 찾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이것저것 찍먹해 보니 나는 사극을 좋아하고, 그중에서 일반 고장극(권력, 암투, 로맨스)을 무협극(강호 고수), 선협극(신선과 마족의 등장, 세계멸망 어쩌고) 보다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런 취향으로 골라본 최근 본 중국드라마들의 짧은 리뷰.
묵우운간
로맨스 고장극 | 오근언, 왕성월 주연 | 티빙, 웨이브, 모아

나라 최고의 재녀로 이름을 날렸던 설방비(설리)는 간통 누명을 쓰고 남편 심옥용에게 생매장당했다가, 가여운 소녀 강리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살아남는다. 강리는 경성 귀족의 적녀이지만, 마뜩찮은 이유로 부모에게 버림받고 10년을 정녀당에서 학대당해 왔다. 강리가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설리는 자신과 강리의 원한을 풀기 위해 자신이 강리가 되기로 한다. 하녀 동아의 도움을 받아 강리가 된 설리는 후처 진씨와 이복동생 약요에 맞서 집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다진다. 한편 한림학사인 심옥용에게 접근하기 위해 설방비는 오랫동안 갈고닦은 금기서화 실력으로 단숨에 이름을 떨치고, 심옥용은 자신의 아내와 똑같은 '강리'를 보며 혼란에 빠진다. 한편, 황제의 오른팔인 숙국공 소형은 황권을 위협하는 무리를 경계하기 위해 설방비를 이용하려 하지만, 그가 강씨 가족에게 복수하고 설씨 가족을 구하는 과정을 지켜보거나 도와주면서 점차 그를 사랑하게 된다.
회귀와 복수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말아주는 중국 언정소설 작가 '천산다객'의 <적가천금>이 원작이다. 원작에선 억울하게 죽은 설방비가 강리의 몸으로 다시 살아나 복수하는 이야기이지만, 중국 광총 검열로 회귀 대신 '죽은 이의 신분을 써서' 복수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내용만 보면 그저 그런 회빙환 스토리이지만 <묵우운간>의 매력은 '매운맛'을 '마라맛'으로 바꾸는 연출에 있다. 몇 년 전 화제가 된 드라마 <태자비승직기(한드 <철인왕후> 원작)>에서 과감한 색상 사용과 저세상 카메라워크(!)를 보여준 려호길길이 메인 연출인데(어쩐지 어디서 먹어본 맛인데 싶었더니 <장군재상>이었음), 그때 감 잃지 않은 듯 이번에도 슬로모션, 강렬한 색상 대비, 미친 클로즈업으로 잊지 못할 장면을 선사한다. 특히 <달의 연인>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얼굴 클로즈업이 많은데, 배우들 중 미남미녀가 많아서 이 정도로 살아남았구나 싶다. 누군가에겐 극호, 누군가에겐 극불호가 되기에 이 부분에서 계속 보느냐 마느냐가 결정되는 듯하다.
<묵우운간>은 설방비/강리 역의 오근언이 이끌어가지만(그리고 연기 정말 잘했지만), 최대 수혜자를 꼽으라면 단연 숙국공(듀크쑥!) 소형 역의 왕성월이다. 빨간 옷, 검은 부채로 화려하게 차려입고 '날아오르는' 첫 등장부터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주생여고>도 봤고 <영안여몽>도 봐서 왕성월이 고장극 복장이 잘 어울리는 건 알지만 이렇게 화려한 것까지 잘 소화할 줄은 몰랐다. 물론, 비주얼이 되니까 과감한 색상과 디자인이 착붙이 된 게 아닐까. 숙국공이 화려함으로 시선을 사로잡는 역할이라면, 연기로 어필하는 캐릭터는 전남편 심옥용이다. 양영기라는 배우는 이 드라마로 처음 봤는데 심옥용이라는 복잡한 캐릭터를 잘 소화했고, <연희공략> 이후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 오근언과의 대결에서도 밀리지 않았다.
석화지
로맨스 고장극 | 장정의, 호일천 주연 | 티빙, 웨이브

황제에게 직언을 했다는 이유로 화씨 가문은 하루아침에 풍비박산 난다. 가산을 몰수당하고 할아버지부터 열살 먹은 손자까지 남자는 모두 북방으로 유배되자, 화씨 집안의 장손녀 화지는 연로한 할머니와 어머니, 숙모를 대신해 집안을 이끈다. 화지는 우여곡절 끝에 다과점을 열고, 곧 뛰어난 장사 수완으로 돈을 모으며 화씨 집안을 조금씩 알린다. 한편 황제의 조카인 릉왕 세자 고안석은 큰아버지의 명으로 황제 직속 칠숙사의 우두머리가 되고, 오래전 어머니를 죽인 릉왕부 화재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화씨 집안의 누군가를 찾으려 한다. 그때 안석의 동생인 작약이 릉왕부에서 나와 화지의 집에 머물면서 안석은 화지와 친분을 맺고, 두 사람은 무술 선생과 고용인의 관계로 시작해 서로에 대한 호감을 키워간다. 안석은 화지를 사랑하게 되면서 자신의 신분과 화씨 집안에 접근한 목적을 고백하고, 화지의 도움을 받아 화재 사건의 진실을 밝힌다. 그리고 두 사람은 미래를 약속하는데...
<석화지>를 로맨스 고장극으로 분류하긴 했지만, 남녀 주인공의 로맨스가 많을 것이라 기대하고 보면 실망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화지를 중심으로 화씨 집안 여성들이 가문을 다시 일으키는 스토리가 메인이기 때문이다. 규방에서 금기서화와 '내조 잘하는 법'만 교육받은 귀족 가문 여성들이 돈을 벌고 생계를 꾸려나가는데, 거기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사건을 경험하며 성장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원래 원작 소설은 현대 여성의 영혼이 화지의 몸에 들어간다는 설정이지만, 여기에선 (검열 문제로) 화지라는 인물 자체가 규방에 갇힌 '숨은 인재'라는 설정으로 수정됐다. 고대가 배경이지만, 현대 여성이 꿈꾸는 일 잘하고 연애 잘하는 이상적 현대 여성의 삶을 화지가 보여준다. 어떤 선택을 하든 화지를 사랑하고 응원하는 고안석과 그의 사연도 흥미롭다.
호일천과 장정의, 주연 배우는 이번에 연기하는 걸 처음 본다. 그도 그럴 것이, 호일천은 <절대쌍교> 외에 고장극은 거의 찍지 않았고, 장정의는 <석화지>가 첫 고장극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 다 연기를 엄청 잘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영 나쁘진 않았다 (로맨스에 영혼이 있으면 좋겠다는 평가가 많은데, 이 정도면 괜찮아요). 연기를 언급하고 싶은 배우는 작약 역의 노욱효다. 최근 여러 고장극에서 조연으로 활약하는 배우인데, 다른 사람들과는 좀 다른 작약을 잘 표현했다. 심환 역 변정과의 케미도 좋았다. <운지우>와 <석화지>를 통해 극과 극의 캐릭터도 다 소화할 수 있음을 보여줘서, 다음엔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 기대가 된다.
장락곡
로맨스 고장극 | 정우혜, 등은희 주연 | 티빙, 웨이브, 모아

태황태후 직속 감찰기관인 내외사의 수장, 심도는 '백무상'이라 불리며 악명을 떨친다. 그와 안 씨 집안 여식의 혼인이 결정되자, 혼인이 가장 유력했던 셋째 딸은 정인과 도망치고, 여섯째 딸인 안행이 언니를 대신해 신부가 된다. 온갖 수를 썼음에도 결국 혼인을 하게 된 심도와 안행은 각자의 목적을 위해 얼마 후 이혼하기로 합의하고 금슬 좋은 신혼부부 연기를 시작한다. 안행은 형부 서리로 일하며 범죄 해결에 탁월한 재능을 보이고, 심도는 진실을 위해서라면 어디에든 달려드는 안행을 불안해하며 지켜준다. 두 사람은 경성과 지방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이 '화아문'이라는 한 사이비 집단과 연관됐음을 알고는 정체를 파헤쳐 간다. 사실 안행과 심도는 인연이 있는데, 어릴 적 죄인 수용소에 갇힌 심도를 안행이 돌봐줬던 적이 있었다. 안행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자신을 설레게 한 소년 심도를 잊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심도는 그때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한데...
잘생기고 연기도 잘해서 눈에 담아둔 정우혜의 최신 로맨스 고장극. 얼떨결에 가짜 신부가 된 형부 수사관과 감찰부 수장의 알콩달콩 선결혼 후연애 스토리인데, 정우혜의 비주얼과 연기력을 아낌없이 활용한다. 상대역은 <아화아적시광소년>의 등은희가 맡았는데, 아역 배우 출신인 05년생으로 만 19세, 올해 갓 성인이 되었다 (정우혜와 10살 차이). 심도와 안행 두 사람도 나이가 차이가 꽤 있고(5살 이상?), 조정 내의 직위도 차이가 있는 편이라, 현실에서의 차이가 극 속 캐릭터와 관계에서 투영되는 느낌도 있다 (물론 등은희의 커리어는 동급 최강). 그래서 심도와 안행 두 사람의 관계가 변하는 과정이 꽤 흥미롭다. 처음엔 눈앞에 알짱거리는 게 귀찮은 존재였는데 어느새 눈앞에 없으면 안 되는, 가장 애정하는 존재가 되는 과정이 꽤 설레게 묘사된다. 그래도 기본은 로맨스+수사물인지라 수사 이야기도 중요한 축인데, 지금까지 방영된 분량에서는 사건 이야기도 흥미진진하다.
<장락곡>이 아쉬운 점은 그것 외 전부이다. 이 작품은 겨울에 촬영을 끝냈는데 9월에 공개됐다. 일반적으로 포스트 프로덕션 기간을 오래 가지는 중국드라마 특성상 굉장히 빨리 공개된 편인데, 그래서인지 완성본을 '당장 빨리' 만들 수 있는 선택을 한 것 같다. 이 드라마의 주요 배역의 음성은 대부분 성우 더빙으로 처리됐는데, 캐스팅이 이게 최선이었나 싶을 만큼 별로였다. 특히 <칠시길상>으로 정우혜의 원음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알고 있어서 직접 후시녹음을 하지 않은 게 너무 아쉬웠다 (이미 다른 작품 촬영이 예정되어 있어서 스케줄 때문에 불가능했을 것이다.)
<장락곡>은 2024년 12월 15일 기준 티빙, 웨이브, 모아에 최종화까지 업데이트되었다.